종전선언, 평화를 위한 길로 가고 있습니까?
이연희 사무총장
지난 9월 유엔총회 연설 이후 정부는 임기 말의 모든 외교적 노력을 종전선언에 집중해 왔습니다. 최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한미간 종전선언 문구에 대한 조율을 마쳤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는 구상은 실현되기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3개월여간 총력을 집중한 외교전의 결과입니다.
70년을 넘게 끌어온 전쟁을 끝내자는 것은 상식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가깝게는 2018년에 되었어야 하는 일이고, 혹은 30여년전 냉전 해체기에 되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임기말이든 언제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접근으로 가능한 일인가, 종전을 선언하는 것만이 현 시점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대목이 많습니다.
얼마 전 유엔사령부가 군복차림으로 DMZ를 찾은 윤석열 국민의 힘 후보를 향해 '정전협정 위반'이라며, '근본원인을 파악하고 정전협정 위반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진상조사하겠다'고 보도자료를 내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군복 차림으로 비무장지대를 찾은 정치인이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유독 윤 후보의 복장을 문제 삼은 것도, 굳이 홈페이지 등에 보도자료를 낸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미국은 유엔사의 임무를 정전관리를 넘어 전반적인 한반도 위기관리 기능까지 담당하도록 확장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4년부터 유엔사 재활성화 프로그램을 통해 인력, 조직, 기능 등을 꾸준히 확대해 왔습니다. 구성에서나 역할에서 사실상 주한미군 산하의 형식적인 사령부에 불과했던 유엔사를 미국이 확장해 온 것은 한국군에 전시작전권을 이양한 뒤 유엔사를 통해 한국군을 통제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냐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급기야 2018년에는 남북의 합의사항인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철수와 철도-도로 연결사업 등에 대해 '유엔사의 판단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해 8월엔 정부가 북쪽의 경의선 철도 조사를 위해 군사분계선 통과를 신청했지만 유엔사가 허가 않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2018, 19년 남북관계의 모든 현장에 유엔사가 확실한 존재감을 나타낸 사건은 많습니다.
정부가 종전선언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발생한 이번 사건도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관할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음을 부각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헤프닝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종전선언이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 앞에 '절대 아니'라며, 종전선언이 정전체제를 흔들지 않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단계, 즉 평화협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표명하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의지를 표명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순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 북미가 각각 판문점 선언과 북미 싱가포르 선언에서 이미 의지 수준의 합의에는 도달할 바 있습니다. 협상은 중단됐고, 문턱은 더 높아졌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는 선언을 왜 또 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전보다 급한 일은 평화를 위해 한걸음 내딛는 일, 평화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걷는 일입니다. 종전이 선언되면 유엔사는 기능을 다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평화협정과 평화체제 수립까지 과도기를 어떻게 관리할지 대책을 마련할 문제이지 유엔사를 무조건 유지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난 12월 2일 진행된 53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한미 양국은 "새로운 전략기획지침(SPG)을 승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한-미 군당국이 한반도 유사시를 가정한 작전계획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전략지침·권한을 한-미 군사위원에 부여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이 한 방송 인터뷰에서 "새 작전계획에 중국에 대한 대응방안도 담겨야 한다"고 밝혀, 우리 국방부가 급히 진화에 나섰습니다.
전쟁을 염두에 둔 새로운 작전계획이 추가로 수립되는 것도 남북, 북미간 대결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불안한 일이지만 여기에 '대중국 대응까지 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한반도를 미중전략경쟁의 희생양으로 만들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한일 관계가 해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의 주선으로 만들어지는 한미일간 외교, 안보, 군사논의가 올해 내내 빈번하게 진행되어 온 것도 한미일 군사동맹을 지향하는 방향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종전이 우선이 아니라, 과연 평화를 위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현 정부 들어 국방예산이 55조을 넘겨 인상률의 최고치를 경신한 가운데 이 중 17조가 넘는 규모가 무기구입에 쓰여질 예정이며, 1조원을 훌쩍 넘겨 인상된 한미방위비분담금을 향후 6년간 국방비 인상률에 따라 인상하기로 한 것도 전례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대북전쟁계획은 앞으로 진행될 남북, 북미협상의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지난 평화협상의 성과를 원점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유엔사의 월권이 이 같은 상황들과 겹쳐지는 이유는 우리가 평화를 위한 방향이 아니라 대결의 방향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전을 위해서 한미간 문구를 조율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남북 군사합의 이행을 통한 불가침과 평화군축을 우선하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접근일까요? 남북관계가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전략경쟁에서 남북이 협상력을 발휘하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면 어떻습니까?
세계질서의 지각변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 명목 GDP가 미국을 넘어서는 시점이 2030년이라니 미중간 전략경쟁은 날로 첨예해질 것입니다. 대선 레이스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한반도의 미래를 내다보는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세계사적 전환기에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지, 공론의 장, 성숙한 논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종전선언, 평화를 위한 길로 가고 있습니까?
이연희 사무총장
지난 9월 유엔총회 연설 이후 정부는 임기 말의 모든 외교적 노력을 종전선언에 집중해 왔습니다. 최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한미간 종전선언 문구에 대한 조율을 마쳤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는 구상은 실현되기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3개월여간 총력을 집중한 외교전의 결과입니다.
70년을 넘게 끌어온 전쟁을 끝내자는 것은 상식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가깝게는 2018년에 되었어야 하는 일이고, 혹은 30여년전 냉전 해체기에 되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임기말이든 언제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접근으로 가능한 일인가, 종전을 선언하는 것만이 현 시점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대목이 많습니다.
얼마 전 유엔사령부가 군복차림으로 DMZ를 찾은 윤석열 국민의 힘 후보를 향해 '정전협정 위반'이라며, '근본원인을 파악하고 정전협정 위반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진상조사하겠다'고 보도자료를 내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군복 차림으로 비무장지대를 찾은 정치인이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유독 윤 후보의 복장을 문제 삼은 것도, 굳이 홈페이지 등에 보도자료를 낸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미국은 유엔사의 임무를 정전관리를 넘어 전반적인 한반도 위기관리 기능까지 담당하도록 확장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4년부터 유엔사 재활성화 프로그램을 통해 인력, 조직, 기능 등을 꾸준히 확대해 왔습니다. 구성에서나 역할에서 사실상 주한미군 산하의 형식적인 사령부에 불과했던 유엔사를 미국이 확장해 온 것은 한국군에 전시작전권을 이양한 뒤 유엔사를 통해 한국군을 통제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냐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급기야 2018년에는 남북의 합의사항인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철수와 철도-도로 연결사업 등에 대해 '유엔사의 판단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해 8월엔 정부가 북쪽의 경의선 철도 조사를 위해 군사분계선 통과를 신청했지만 유엔사가 허가 않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2018, 19년 남북관계의 모든 현장에 유엔사가 확실한 존재감을 나타낸 사건은 많습니다.
정부가 종전선언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발생한 이번 사건도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관할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음을 부각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헤프닝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종전선언이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 앞에 '절대 아니'라며, 종전선언이 정전체제를 흔들지 않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단계, 즉 평화협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표명하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의지를 표명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순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 북미가 각각 판문점 선언과 북미 싱가포르 선언에서 이미 의지 수준의 합의에는 도달할 바 있습니다. 협상은 중단됐고, 문턱은 더 높아졌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는 선언을 왜 또 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전보다 급한 일은 평화를 위해 한걸음 내딛는 일, 평화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걷는 일입니다. 종전이 선언되면 유엔사는 기능을 다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평화협정과 평화체제 수립까지 과도기를 어떻게 관리할지 대책을 마련할 문제이지 유엔사를 무조건 유지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난 12월 2일 진행된 53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한미 양국은 "새로운 전략기획지침(SPG)을 승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한-미 군당국이 한반도 유사시를 가정한 작전계획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전략지침·권한을 한-미 군사위원에 부여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이 한 방송 인터뷰에서 "새 작전계획에 중국에 대한 대응방안도 담겨야 한다"고 밝혀, 우리 국방부가 급히 진화에 나섰습니다.
전쟁을 염두에 둔 새로운 작전계획이 추가로 수립되는 것도 남북, 북미간 대결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불안한 일이지만 여기에 '대중국 대응까지 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한반도를 미중전략경쟁의 희생양으로 만들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한일 관계가 해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의 주선으로 만들어지는 한미일간 외교, 안보, 군사논의가 올해 내내 빈번하게 진행되어 온 것도 한미일 군사동맹을 지향하는 방향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종전이 우선이 아니라, 과연 평화를 위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현 정부 들어 국방예산이 55조을 넘겨 인상률의 최고치를 경신한 가운데 이 중 17조가 넘는 규모가 무기구입에 쓰여질 예정이며, 1조원을 훌쩍 넘겨 인상된 한미방위비분담금을 향후 6년간 국방비 인상률에 따라 인상하기로 한 것도 전례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대북전쟁계획은 앞으로 진행될 남북, 북미협상의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지난 평화협상의 성과를 원점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유엔사의 월권이 이 같은 상황들과 겹쳐지는 이유는 우리가 평화를 위한 방향이 아니라 대결의 방향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전을 위해서 한미간 문구를 조율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남북 군사합의 이행을 통한 불가침과 평화군축을 우선하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접근일까요? 남북관계가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전략경쟁에서 남북이 협상력을 발휘하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면 어떻습니까?
세계질서의 지각변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 명목 GDP가 미국을 넘어서는 시점이 2030년이라니 미중간 전략경쟁은 날로 첨예해질 것입니다. 대선 레이스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한반도의 미래를 내다보는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세계사적 전환기에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지, 공론의 장, 성숙한 논의가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