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 재만 조선인 친일 행적 보고서
■ 지은이 : 류연산
■ 아이필드(2004년 02월)
문제가 된 조두남 친일소동의 한가운데에는 정치인이나 운동권 사람들이 비분강개하며 애창했던 <선구자>가 있었다. 중·고등 시절 음악시험의 단골손님이었던 선구자는 조두남 작곡, 윤해영 작사, 1933년 발표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극적인 대목은 “작곡자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을 때인 1933년, 경력을 알 수 없는 작사자의 청에 의해 작곡한 것이다. 만주 벌판을 말을 달리던 옛날 선구자의 모습을 그리며 작곡한 것으로, 두도막 형식으로 된 힘차고 정열적인 가곡이다.”([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1930년대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변절의 변절을 거듭할 무렵 조두남도 <간첩은 날뛴다>, <징병제만세>, <황국의 어머니>와 같은 친일의 노래를 만들었다. 또한 윤해영은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의 노래, 해방 후에는 혁명의 노래, 북한으로 들어간 후에는 토지개혁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다가 1956년 별세했다고 한다.
어쨌든 1990년대 중국 관광길이 열리면서 한국 사람들은 용정 일송정에 가면 의례 <선구자>를 불렀다. <선구자>를 모르는 조선족들을 만나면 화를 내는 경우도 있으나, 그들이 1944년에 발표된 노래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한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널리 불린 애창곡으로 알고 있었다. 한반도 분단은 수 천만 명을 60년 가까이 바보로 만들었다.
한반도 분단이 남긴 수많은 악행의 목록에는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시키고 침묵시킨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누군가 얘기했듯이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잠시는 속일 수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
역사바로세우기를 주도하는 한 조선족 학자, 류연산 선생의 책,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200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의 차녀인 박근영 씨에 의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되어 있다. 명예훼손이 된 사안은 바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부대인 ‘간도조선인특설부대’ 문제이다. 소위 ‘역사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진실이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이제 아래를 보기로 한다.
류연산은 발로 뛰는 학자이다. 그의 모든 글은 문서에 의거해 저술되기 보다는 구술과 1차 자료가 중심이 되어 기록되고 있다. 1920년 봉오동전투 전적지 가는 길을 잠시 살펴보자.
“필자는 봉오동전투의 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1991년부터 수차에 걸쳐서 진행했다. (……) 지금이나 그때나 봉오동으로 가는 차가 없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다면 도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여기에서 왕청 방향인 북으로 1리 정도 가다가 오른편으로 난 골짜기로 발길을 돌리면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마을 이름이 수남촌이다. (……) 수몰 된지 26년이 지난 후인 1991년 우리는 봉오동 골짜기 산허리를 타고 막치기까지 갔었다. 하촌은 물에 잠겨서 거지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중촌과 상촌은 잡목과 잡초 속에 묻혀서 달구지길이며 페허로 된 밭이며 집터들을 간신히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그의 문학가적인 재능과 노력은 독자로 하여금 보지 않고도 마치나 사진을 보는 듯한 묘사력을 제공해준다.
어찌되었건 그가 찾은 봉오동전투의 사령관이었던 홍범도와 최진동, 두 명 중에 최진동을 둘러싼 한국의 공식기록은 실제 상황과는 배치되었다. 한국 측에서는 최진동이 봉오동전투 후에도 “북간도·시베리아 등지에서 부하 수천 명을 거느리고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류연산의 조사에 다르면 최진동은 1931년 이후 일제에 투항했을 뿐만 아니라 비행기값을 헌납했던 맹목적 친일파였다.
한국육군사에 길이 남아 있는 정일권 장군에 대한 기록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가 신경육군군관학교(박정희와의 인연도 깊다)의 모범생이어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동생과 친구여서,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얼마나 모범생이었던지 소위를 건너뛰어 중위로 발탁되어서만도 아니다. 1943년 그는 헌병사령부 간도헌병대 대대장, 소령이 되었다. 이 간도헌병대가 했던 일 가운데에는 죄인-독립운동가나 지원자들도 포함-으로 잡힌 사람들을 특별 호송한 일도 포함된다.
우리의 현대사는 항일과 친일의 투쟁사가 아닌가 싶다. 항일부대와 친일부대가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에서 전쟁을 벌였다. 1950년 무대를 한반도로 옮겨와 깃발은 인공기와 대한민국기로 바뀌었으나 얼굴은 그대로 인 채 치러졌고, 1960년대 중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에서 역시 깃발은 바뀌었으나 얼굴은 그대로 인 채 치러졌다. 세 번에 이르는 한 편의 주인공들을 양성한 것은, 일제의 충복이자 주구인 이범익이 설립한 ‘간도조선인특설부대’였다. 이 부대는 만주국 간도성장이었던 충북 단양 사람 이범익이 조선총독부에 ‘반만 항일애국무장 역량을 소멸’할 목적으로 제안 되여 1938년 9월 설립되었다. 군관만 일본인이었고, 위관 이하 대대급 병력은 순수 조선인이었다. 조선인들을 보면 김석범, 김송X, 김찬규, 김홍준 등이 있다.
그 부대원 가운데 한국의 현대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단연 박정희 중위였다. 그 부대의 노래를 보면,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대화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이 부대는 1944년 해산하기까지 동북항일연군-김일성부대가 대표적이며, 군대의 대부분이 조선인들임-이나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일삼아왔다. 각지에서 토벌한 회수는 108건, 항일연군 혹은 팔로군 170명을 사살하고, 139명을 체포했다. 그런 가운데 가랑잎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는 김일성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류연산은 일제 친일파를 ‘살인자’로 명명한다. 그래서 중국 동북3성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이름 없이 희생되어간 사람이 무려 5만 명이 넘는다. 일제와 친일파는 항일세력이나 그들을 지원했던 민중을 ‘삼광정책’으로 ‘모조리 죽이고, 빼앗고, 불살랐다’. 또한 재일 지식인 윤건차 선생의 지적을 첨언하자면 친일은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만이 아니라, 일본 파시즘에 대한 굴복이었으므로 결국 친일은 ‘인류 전체에 대한 배신’이다.
이제 월남한 친일파들은 또다시 역전의 명수가 되었다.
“두 시대를 살아온 한국의 풍류 인물들을 보면 대개 두 개의 얼굴이다. 하나는 친일이고 다른 하나는 반공이다. 그러나 그 얼굴을 찬찬히 보면 그들의 표정에서 하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다름 아닌 외세에 아부하는 주구의 마음이다”
더 이상 과거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은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정의가 실현되는 한반도와 세계의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다. 또한 과거청산은 민주화의 ‘가나다’이다. 실질적인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금씩이나마 얻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기회를, 죽 쑤어 개 좋은 일 할 수는 없다. 이제 통일로 향하는 길에 남북, 해외가 한데 얼려 냉전시대의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를 바르게 잡고 민중의 숨결이 녹아 있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 재만 조선인 친일 행적 보고서 서문 부록|중국 조선족 음악가 김종화 선생의 증언 |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 재만 조선인 친일 행적 보고서
■ 지은이 : 류연산
■ 아이필드(2004년 02월)
문제가 된 조두남 친일소동의 한가운데에는 정치인이나 운동권 사람들이 비분강개하며 애창했던 <선구자>가 있었다. 중·고등 시절 음악시험의 단골손님이었던 선구자는 조두남 작곡, 윤해영 작사, 1933년 발표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극적인 대목은 “작곡자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을 때인 1933년, 경력을 알 수 없는 작사자의 청에 의해 작곡한 것이다. 만주 벌판을 말을 달리던 옛날 선구자의 모습을 그리며 작곡한 것으로, 두도막 형식으로 된 힘차고 정열적인 가곡이다.”([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1930년대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변절의 변절을 거듭할 무렵 조두남도 <간첩은 날뛴다>, <징병제만세>, <황국의 어머니>와 같은 친일의 노래를 만들었다. 또한 윤해영은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의 노래, 해방 후에는 혁명의 노래, 북한으로 들어간 후에는 토지개혁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다가 1956년 별세했다고 한다.
어쨌든 1990년대 중국 관광길이 열리면서 한국 사람들은 용정 일송정에 가면 의례 <선구자>를 불렀다. <선구자>를 모르는 조선족들을 만나면 화를 내는 경우도 있으나, 그들이 1944년에 발표된 노래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한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널리 불린 애창곡으로 알고 있었다. 한반도 분단은 수 천만 명을 60년 가까이 바보로 만들었다.
한반도 분단이 남긴 수많은 악행의 목록에는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시키고 침묵시킨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누군가 얘기했듯이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잠시는 속일 수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
역사바로세우기를 주도하는 한 조선족 학자, 류연산 선생의 책,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200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의 차녀인 박근영 씨에 의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되어 있다. 명예훼손이 된 사안은 바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부대인 ‘간도조선인특설부대’ 문제이다. 소위 ‘역사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진실이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이제 아래를 보기로 한다.
류연산은 발로 뛰는 학자이다. 그의 모든 글은 문서에 의거해 저술되기 보다는 구술과 1차 자료가 중심이 되어 기록되고 있다. 1920년 봉오동전투 전적지 가는 길을 잠시 살펴보자.
“필자는 봉오동전투의 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1991년부터 수차에 걸쳐서 진행했다. (……) 지금이나 그때나 봉오동으로 가는 차가 없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다면 도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여기에서 왕청 방향인 북으로 1리 정도 가다가 오른편으로 난 골짜기로 발길을 돌리면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마을 이름이 수남촌이다. (……) 수몰 된지 26년이 지난 후인 1991년 우리는 봉오동 골짜기 산허리를 타고 막치기까지 갔었다. 하촌은 물에 잠겨서 거지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중촌과 상촌은 잡목과 잡초 속에 묻혀서 달구지길이며 페허로 된 밭이며 집터들을 간신히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그의 문학가적인 재능과 노력은 독자로 하여금 보지 않고도 마치나 사진을 보는 듯한 묘사력을 제공해준다.
어찌되었건 그가 찾은 봉오동전투의 사령관이었던 홍범도와 최진동, 두 명 중에 최진동을 둘러싼 한국의 공식기록은 실제 상황과는 배치되었다. 한국 측에서는 최진동이 봉오동전투 후에도 “북간도·시베리아 등지에서 부하 수천 명을 거느리고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류연산의 조사에 다르면 최진동은 1931년 이후 일제에 투항했을 뿐만 아니라 비행기값을 헌납했던 맹목적 친일파였다.
한국육군사에 길이 남아 있는 정일권 장군에 대한 기록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가 신경육군군관학교(박정희와의 인연도 깊다)의 모범생이어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동생과 친구여서,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얼마나 모범생이었던지 소위를 건너뛰어 중위로 발탁되어서만도 아니다. 1943년 그는 헌병사령부 간도헌병대 대대장, 소령이 되었다. 이 간도헌병대가 했던 일 가운데에는 죄인-독립운동가나 지원자들도 포함-으로 잡힌 사람들을 특별 호송한 일도 포함된다.
우리의 현대사는 항일과 친일의 투쟁사가 아닌가 싶다. 항일부대와 친일부대가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에서 전쟁을 벌였다. 1950년 무대를 한반도로 옮겨와 깃발은 인공기와 대한민국기로 바뀌었으나 얼굴은 그대로 인 채 치러졌고, 1960년대 중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에서 역시 깃발은 바뀌었으나 얼굴은 그대로 인 채 치러졌다. 세 번에 이르는 한 편의 주인공들을 양성한 것은, 일제의 충복이자 주구인 이범익이 설립한 ‘간도조선인특설부대’였다. 이 부대는 만주국 간도성장이었던 충북 단양 사람 이범익이 조선총독부에 ‘반만 항일애국무장 역량을 소멸’할 목적으로 제안 되여 1938년 9월 설립되었다. 군관만 일본인이었고, 위관 이하 대대급 병력은 순수 조선인이었다. 조선인들을 보면 김석범, 김송X, 김찬규, 김홍준 등이 있다.
그 부대원 가운데 한국의 현대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단연 박정희 중위였다. 그 부대의 노래를 보면,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대화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이 부대는 1944년 해산하기까지 동북항일연군-김일성부대가 대표적이며, 군대의 대부분이 조선인들임-이나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일삼아왔다. 각지에서 토벌한 회수는 108건, 항일연군 혹은 팔로군 170명을 사살하고, 139명을 체포했다. 그런 가운데 가랑잎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는 김일성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류연산은 일제 친일파를 ‘살인자’로 명명한다. 그래서 중국 동북3성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이름 없이 희생되어간 사람이 무려 5만 명이 넘는다. 일제와 친일파는 항일세력이나 그들을 지원했던 민중을 ‘삼광정책’으로 ‘모조리 죽이고, 빼앗고, 불살랐다’. 또한 재일 지식인 윤건차 선생의 지적을 첨언하자면 친일은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만이 아니라, 일본 파시즘에 대한 굴복이었으므로 결국 친일은 ‘인류 전체에 대한 배신’이다.
이제 월남한 친일파들은 또다시 역전의 명수가 되었다.
“두 시대를 살아온 한국의 풍류 인물들을 보면 대개 두 개의 얼굴이다. 하나는 친일이고 다른 하나는 반공이다. 그러나 그 얼굴을 찬찬히 보면 그들의 표정에서 하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다름 아닌 외세에 아부하는 주구의 마음이다”
더 이상 과거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은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정의가 실현되는 한반도와 세계의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다. 또한 과거청산은 민주화의 ‘가나다’이다. 실질적인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 조금씩이나마 얻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기회를, 죽 쑤어 개 좋은 일 할 수는 없다. 이제 통일로 향하는 길에 남북, 해외가 한데 얼려 냉전시대의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를 바르게 잡고 민중의 숨결이 녹아 있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 재만 조선인 친일 행적 보고서 서문 부록|중국 조선족 음악가 김종화 선생의 증언 |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