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과 왈츠를』
- 러시아 여기자의 김정일 극동방문 동행취재기
■ 지은이 : 올가 말리체바 | 박정민 · 임을출 옮김
■ 한울 (2004년)
`김정일과 왈츠를’
만일 당신이 대한민국의 건강한 젊은(!) 여성이고, 또 만일 당신이 방북을 했는데, 극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푸는 왈츠의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는 연회장에 초대를 받았고, 또 만일 국방위원장이 당신에게 왈츠를 추자고 제안 받았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왈츠를 못 춰서 어떻게 하지...?’ 또는 ‘못 추더라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해봐야지’, 또는 ‘부끄럽지만, 스텝을 밟을 줄 아니 멋지게 해봐야지’ 등등의 생각을 하는 대한민국 여성이 얼마나 될까?
1989년 북녘 사회를 들쑤셔 놓았던 20대 초반의 당찬 열혈청년 임수경이라면 출 수 있었을까? 모르겠지만, 나라면 못 추었을 것 같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왜 그러냐면, 이럴 것 같다.
내가 그런 청을 받았다면,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여 생각이 정지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정신을 차리고 국방위원장과 춤추는 행위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것인가, 아닐까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는 만일 내가 춤을 추게 된다면, 직장에서 구설수에 오르고, 급기야 잘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춤을 못 춘다며 극구 사양할 것이다. 또한 나는 아니라고 부인해왔으나 ‘기쁨조’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고, 성도착증 환자, ---매니아 등등의 말을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내 머릿속에는 ‘반공컴플렉스’, ‘국가보안법’이라는 자기검열의 기제가 사라지지 않은 채 시퍼렇게 작동하고 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직후 대구 한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전동창씨가 겪었던 일이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6월 승용차에 인공기 그림을 그린 현수막을 걸고, 사람들에게 ‘김정일 부킹위원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나눠줬다. 그는 그날 저녁 나이트클럽으로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 현행범’으로 연행됐다가 하룻밤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목 차 한국어판 서문 |
김정일이나 북녘 최상층의 부패, 광란상을 담은 책을 몇 가지만 꼽아보자. 『진달래꽃 필때까지1, 2』(신영희 저, 문예당, 1996), 『김정일의 요리사』(후지모토 겐지 저, 월간조선사, 2003), 『김정일의 모든 것』(손광주 저, 바다출판사, 2003),『니들이 북한을 알어?』(장용철 저, 참세상닷컴, 2003), 『김정일 로얄 패밀리』(이한영 저, 시대정신, 2004) 등. 놀라운 일은 신영희의 책을 제외한 다른 책들이 모두 2000년 6·15 이후에 출간되었다는 점이 눈에 띤다.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김정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재반전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정일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과 해설을 하고 있는 책으로 정창현의 『곁에서 본 김정일』은 오히려 비정상적이라고 할까? 이 책은 북녘에서 김정일 당비서 시절 최측근이었다고 하는 신경완 씨의 증언을 토대로 각종 문서들을 바탕으로 하여 집필되었고, 잘 알려져 있듯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했던 당시 필독서가 되었다. 저자의 관심이나 신경완 씨의 활동 반경을 볼 때 이 책은 정치인으로서의 김정일에 역사적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에게 인간 김정일을 소개해줄 길라잡이는 없을까? 러시아 기자 올가 말리체바가 쓴『김정일과 왈츠를』(한울, 2004)은 한국에서 출판된 어느 글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반공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운 시각의 김정일을 발견한다.
처음 올가 기자는 2002년 2월 러시아 대통령이 극동 연방 관구에 파견한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전권 대사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방북하여 김정일을 인터뷰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은 2002년 8월 김정일의 러시아 극동 순방길에서 5일간 동행 밀착 취재를 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두 번째 자리에서 올가는 김정일과 왈츠를 추었다.
그는 위엄을 갖춘 몸짓으로 손을 내밀어 왈츠를 신청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왼손을 얹고 오른손을 그의 왼쪽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는 마치 괜찮은 무용전문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훌륭하게 왈츠를 추었다. 멜로디의 마지막 박자에서 춤을 멈추고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고, 나도 가볍게 답례했다. 이 왈츠의 선율은 지금도 내 귓가에 생생하다(46쪽).
올가는 속된 말로 “홍콩갔다”고 한다. 사실 이미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곤 당차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했다. 그 소원은 5분 동안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라는 것이었다. 첫 물음에 대한 대답은 말리체바의 영혼을 흔들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어린 시절 잃은 어머니죠. 그녀는 혁명 전사였어요.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당신의 아들이 모든 일에서 잘되기를 바라셨죠. 그러나 오늘날의 나의 모습은 상상도 못하셨을 거예요. 나는 많은 점에서 그녀에게 감사해요.”(40쪽)
만 7세이었던 김정일의 심장에 새겨진 사람은 바로 어머니, 김정숙이었다. 러시아 남성라면 올가 기자의 질문에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어머니라는 대답이 적지 않더라도 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 남성의 십중팔구는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올가는 김정일을 둘러싼 중요한 퀴즈를 풀어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기차로 여행을 하십니까?”
“외신들은 나를 ‘고소공포증 환자’로 묘사하고 싶어한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가면 내가 (그 나라에 대해) 뭘 알 수 있겠소? 아무것도 없소. 정치가들 하고만 대화를 나누겠지요. 나는 내 눈으로 러시아의 장단점을 직접 보고 싶은 거요. 앞으로 모스크바 방문이 성사되면 비행기를 타고, 만일 극동으로 간다면 다시 기차를 탈 것이오.”(44쪽)
이제 다시 생각해본다. 만일 그가 나에게 “쉘 위 댄스(Shall we dance?)”라고 청해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선뜻 대답을 하긴 어렵지만, 올가 기자의 글을 접하고 나니 얼굴에 절로 미소가 돈다. 진정 반공 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상상을 하고 싶다. 우리 모두 지겨운 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
『김정일과 왈츠를』
- 러시아 여기자의 김정일 극동방문 동행취재기
■ 지은이 : 올가 말리체바 | 박정민 · 임을출 옮김
■ 한울 (2004년)
`김정일과 왈츠를’
만일 당신이 대한민국의 건강한 젊은(!) 여성이고, 또 만일 당신이 방북을 했는데, 극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푸는 왈츠의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는 연회장에 초대를 받았고, 또 만일 국방위원장이 당신에게 왈츠를 추자고 제안 받았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왈츠를 못 춰서 어떻게 하지...?’ 또는 ‘못 추더라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해봐야지’, 또는 ‘부끄럽지만, 스텝을 밟을 줄 아니 멋지게 해봐야지’ 등등의 생각을 하는 대한민국 여성이 얼마나 될까?
1989년 북녘 사회를 들쑤셔 놓았던 20대 초반의 당찬 열혈청년 임수경이라면 출 수 있었을까? 모르겠지만, 나라면 못 추었을 것 같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왜 그러냐면, 이럴 것 같다.
내가 그런 청을 받았다면,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여 생각이 정지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정신을 차리고 국방위원장과 춤추는 행위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것인가, 아닐까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는 만일 내가 춤을 추게 된다면, 직장에서 구설수에 오르고, 급기야 잘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춤을 못 춘다며 극구 사양할 것이다. 또한 나는 아니라고 부인해왔으나 ‘기쁨조’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고, 성도착증 환자, ---매니아 등등의 말을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내 머릿속에는 ‘반공컴플렉스’, ‘국가보안법’이라는 자기검열의 기제가 사라지지 않은 채 시퍼렇게 작동하고 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직후 대구 한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전동창씨가 겪었던 일이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6월 승용차에 인공기 그림을 그린 현수막을 걸고, 사람들에게 ‘김정일 부킹위원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나눠줬다. 그는 그날 저녁 나이트클럽으로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 현행범’으로 연행됐다가 하룻밤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목 차 한국어판 서문 |
김정일이나 북녘 최상층의 부패, 광란상을 담은 책을 몇 가지만 꼽아보자. 『진달래꽃 필때까지1, 2』(신영희 저, 문예당, 1996), 『김정일의 요리사』(후지모토 겐지 저, 월간조선사, 2003), 『김정일의 모든 것』(손광주 저, 바다출판사, 2003),『니들이 북한을 알어?』(장용철 저, 참세상닷컴, 2003), 『김정일 로얄 패밀리』(이한영 저, 시대정신, 2004) 등. 놀라운 일은 신영희의 책을 제외한 다른 책들이 모두 2000년 6·15 이후에 출간되었다는 점이 눈에 띤다.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김정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재반전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정일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과 해설을 하고 있는 책으로 정창현의 『곁에서 본 김정일』은 오히려 비정상적이라고 할까? 이 책은 북녘에서 김정일 당비서 시절 최측근이었다고 하는 신경완 씨의 증언을 토대로 각종 문서들을 바탕으로 하여 집필되었고, 잘 알려져 있듯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했던 당시 필독서가 되었다. 저자의 관심이나 신경완 씨의 활동 반경을 볼 때 이 책은 정치인으로서의 김정일에 역사적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에게 인간 김정일을 소개해줄 길라잡이는 없을까? 러시아 기자 올가 말리체바가 쓴『김정일과 왈츠를』(한울, 2004)은 한국에서 출판된 어느 글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반공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운 시각의 김정일을 발견한다.
처음 올가 기자는 2002년 2월 러시아 대통령이 극동 연방 관구에 파견한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전권 대사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방북하여 김정일을 인터뷰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은 2002년 8월 김정일의 러시아 극동 순방길에서 5일간 동행 밀착 취재를 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두 번째 자리에서 올가는 김정일과 왈츠를 추었다.
그는 위엄을 갖춘 몸짓으로 손을 내밀어 왈츠를 신청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왼손을 얹고 오른손을 그의 왼쪽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는 마치 괜찮은 무용전문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훌륭하게 왈츠를 추었다. 멜로디의 마지막 박자에서 춤을 멈추고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고, 나도 가볍게 답례했다. 이 왈츠의 선율은 지금도 내 귓가에 생생하다(46쪽).
올가는 속된 말로 “홍콩갔다”고 한다. 사실 이미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곤 당차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했다. 그 소원은 5분 동안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라는 것이었다. 첫 물음에 대한 대답은 말리체바의 영혼을 흔들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은 누구인가요?”
“어린 시절 잃은 어머니죠. 그녀는 혁명 전사였어요.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당신의 아들이 모든 일에서 잘되기를 바라셨죠. 그러나 오늘날의 나의 모습은 상상도 못하셨을 거예요. 나는 많은 점에서 그녀에게 감사해요.”(40쪽)
만 7세이었던 김정일의 심장에 새겨진 사람은 바로 어머니, 김정숙이었다. 러시아 남성라면 올가 기자의 질문에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어머니라는 대답이 적지 않더라도 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 남성의 십중팔구는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올가는 김정일을 둘러싼 중요한 퀴즈를 풀어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기차로 여행을 하십니까?”
“외신들은 나를 ‘고소공포증 환자’로 묘사하고 싶어한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가면 내가 (그 나라에 대해) 뭘 알 수 있겠소? 아무것도 없소. 정치가들 하고만 대화를 나누겠지요. 나는 내 눈으로 러시아의 장단점을 직접 보고 싶은 거요. 앞으로 모스크바 방문이 성사되면 비행기를 타고, 만일 극동으로 간다면 다시 기차를 탈 것이오.”(44쪽)
이제 다시 생각해본다. 만일 그가 나에게 “쉘 위 댄스(Shall we dance?)”라고 청해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선뜻 대답을 하긴 어렵지만, 올가 기자의 글을 접하고 나니 얼굴에 절로 미소가 돈다. 진정 반공 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상상을 하고 싶다. 우리 모두 지겨운 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