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백』
- 윤이상 부인 이수자의 북한 이야기
■ 지은이 : 이수자
■ 한겨레신문사(2001년 09월)
2005년 분단60년이라는 기록에 개인사적 기록을 하나 더하면, 윤이상 선생(1917. 9.17-1995. 11.3)이 저 세상으로 돌아간 지 10년째 되는 해이다. 그는 토마스 울프(Thomas Wolf)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 하리 You Can’t Go Home Again』(1940)처럼, 1967년 소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국제 음악계와 독일정부의 노력으로 독일로 돌아간 후 다시는 고향 통영에 가지 못하였다.
그는 고향과 조국을 잃은 설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한 후에도 ‘서양현대음악 기법으로 한국적 이미지를 표현한다거나 한국음악의 연주기법에 서양악기를 결합시켜 불멸의 윤이상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인 《심청》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19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1981),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19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우리 음악교육사에서 잊혀진 기록 가운데에는 윤이상과 관련된 사실을 반드시 짚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전쟁기, 전화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로하고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의 교육현장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전시작곡가협회>의 회원들과 함께 윤이상이 초등학교용 학년별 6권의 음악교과서와 노래책 『소년 기마대』를 제작한 사실이다. 그 책들에는 총 105곡의 동요가 실려 있고 그 가운데 최소한 55곡이 윤이상의 작품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곡들로는 《꼬마 위문대》, 《아가 병정》, 《날아라 소년 항공기》, 《꼬마 병정 나가신다》, 《반디야 반디야》, 《말조심》 등이 있지만, 2003년 현재 초등학교에서 쓰이는 음악 교재 어디에도 윤이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조국은 철저하게 윤이상을 부정했으나, 윤이상은 생전에 베를린 자택 앞마당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고 일본을 방문할 때는 멀리서나마 고향 앞바다를 보기 위해 남해안 근처까지 가는 등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94년부터 1995년초까지 일본에 머물면서도 늘 가고 싶어 한 곳은 고향. 그는 먼 발치 현해탄에서 통영을 바라다보고 독일로 돌아간 직후 세상을 떴다.
그러나 윤이상 선생과 관련하여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바로 그의 불멸의 연인 이수자 여사의 귀국 문제이다. 그에게 있어서 윤이상은 사랑하는 지아비이자, 자신의 긍지이며 자부심이다. 그 절절한 사랑을 『내 남편 윤이상 상,하』(창작과비평사, 1998)에 쏟아내었다.
부부를 잘 아는 지인들은 얘기한다. 윤이상의 고향 방문의 희망을 좌절(?)시킨 사람이 바로 이수자 여사라고. 이 여사는 “남편의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갈 수 없다”며 1967년 동백림 사건 이후 한 번도 고국을 찾은 적이 없다. 우리는 윤이상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실에만 주목할 뿐, 사실 이수자 여사도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윤이상 선생과의 사별 후 그는 아들, 딸이 독일에서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 안타까워 독일을 나가 자유롭게 살도록 하였다. 자신은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북녘을 방문하곤 한다. 이미 김일성 고 주석은 생전에 윤이상 선생에게 평양근교 아담한 산장-소위 ‘철봉산장’-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이제 독신이 된 이 여사는 고향이 그립고 고향사람이 그리울 때면 그곳을 찾아간다. 또한 북녘 곳곳을 누비며 북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며 또 다른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발자취에는 윤이상 선생의 흔적이 깃들여 있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 녹아있다. 오늘도 그는 윤이상과의 대화를 계속한다. 그 기록이 바로 『나의 독백: 윤이상 부인 이수자의 북한 이야기』(한겨레신문사, 2001)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난민 아닌 난민의 심정으로 분단 없는 조국을 꿈꾸며 조국의 사람들과 산천을 접하며 느낀 심정을 진솔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이수자 여사를 발견한다. 그에게서 북녘을 애써 꾸미려 하는 기색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1990년 초 베를린, 윤이상 선생에게 북녘과의 경협사업의 길을 터달라며 한국의 유명 기업인이 찾아 왔을 때의 대화이다.
옆에 앉아 듣고 있던 나(이수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러한 길(남북경협)을 통해서 가난하게 사는 북의 인민들에게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했다.
나의 말이 떨어지자 그분(남측 기업가)은 이렇게 말했다.
“가난이란 말은 정신의 태도, 생활의 태도를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정의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치스럽게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먹고 산다고 해서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가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 잘 아는 진리의 말에 나는 얼굴이 뜨거워짐을 감출 수 없었고, 나는 그 기업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말을 단순하고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재생하는 나의 멍청한 사고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북녘 평양 철봉산장에는 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족들이 있다. 보디 가드이자 접대원인 영식이, 딸 노릇을 하는 옥이, 세퍼트견 순남이 등이 그의 가족이다. 하루는 옥이 텔레비전을 보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텔레비전) 화면이 바뀌며 도로 공사장, 수리 공사장, 토지 정리장 등의 소식이 보도된다. 밤낮 보는 보도는 내 눈에나 귀에는 늘 똑같아 보인다.
“어이구, 어째 밤낮 똑같은 보도만 하니. 어제도 그제도 본 것 아니니?”
나는 따분하다. 옆에 앉아 같이 보고 있던 옥이가 설명하듯 한마디 한다.
“어머니, 어데 같은 것입니까. 어제는 자강도이고 오늘은 남포도로공사인데……”
나에게는 다 똑같아 보이는 공사현장이다.
“이거 너무하지 않니?”
그러나 옥이의 눈은 분명히 장소가 다르고, 공사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내 눈과 옥이 눈이 같겠는가.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취미와 옥이의 취미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이런 처지를 이해하기에 남과 북이 어떤 자세로 만나야 할 지를 알고 있다.
“반세기라는 세월은 한 세대가 지나가는 시간이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보고 듣고 살아왔다. 나도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이해하는 정신과 생활태도를 가져보자고 생각했다.”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평화교육의 출발점인 차이의 이해와 다양성의 공존의 가능성을 이수자 여사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초기에는 윤이상 선생과 함께, 또 하나의 조국을 찾아갔지만, 10년이 넘는 동안 북녘 사람들과 만나고 살면서 개인적 삶을 넘어서, 사회주의적 생활양식과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간의 공존 가능성을 확인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모습에서 역시 이념은 인간을 넘어설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기록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1990년대 중후반 북녘 경제난에 대한 체험을 3자적 관점과 역지사지하려는 태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1999년) 8월 2일은 비가 내렸다. (양강도, 과거의 함경남도)대홍단을 둘러보았다. 이곳도 항일전적지이며 북의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곳이다.
(……) 어디로 가나 산이 첩첩 이어져 있는 북의 경치로는 드물게 이곳 대홍단은 마치 눈에 익은 유럽의 풍경이다. 해방 1,000미터 높이에 자리잡은 이곳은 넓은 대평야이다. 추운 곳이라 농작물이 잘 되지 않아 경작지 적은 북의 실정에 이 넓은 고원지대를 그냥 버려두기 안타까워 지난 몇 년간 수해 피해로 식량난을 겪은 북이 정책을 바꾸었다. 북은 쌀밥을 최고로 치는 우리 백성들의 식생활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고심하고 있다. (……)
인구가 적은 이 북방 양강도에 농사짓는 이주민을 모집한 결과, 제대군인 1,000명이 희망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도시처녀 1,000명이 지원했다. 그들이 평양을 떠날 때 도로 주변에서 꽃다발을 던지며 크게 환송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봤다.
문화제국주의적 관점이 아닌, ‘눈높이’식 이해의 관점에서 소위 북녘의 ‘감자농사혁명’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조국의 명승고적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는 남녘에서 잃어버린 ‘금수강산’을 북녘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의 악몽으로 인해 조국을 잊어버리려 했지만, 1979년 처음 방문한 북녘, “조국의 푸르고 높은 하늘, 찬란한 햇빛, 솔솔 불어오는 맑고도 깨끗한 훈풍, 논에 나부끼는 황금 나락, 점점이 서 있는 낮은 산들……”을 바라보며 잊었던 금수강산에 한정 없는 눈물을 흘렸다. 방북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겪어본 체험이 아닐까 싶다. 5년 전 처음 북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1시간 이상을 계속 울었던 내 모습은 이수자 여사의 25년전 모습과 다름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아름다운 산하가 왜 60년이 다되도록 갈려져 있는가? 누구의 잘못인가?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 선생이 음악으로밖에는 고국에 올 수 없던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80을 바라보는 노인 이수자 선생이 왜 아직도 고향을 자유롭게 찾고 가족을 편안하게 만날 수 없는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 잘못을 이제는 그만두자. 이 지긋지긋한 분단의 악몽에서 깨어날 때가 이미 지났는데도 우리는 너무 늦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이수자, 『나의 독백: 윤이상 부인 이수자의 북한 이야기』 목차 책을 내면서 |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
『나의 독백』
- 윤이상 부인 이수자의 북한 이야기
■ 지은이 : 이수자
■ 한겨레신문사(2001년 09월)
2005년 분단60년이라는 기록에 개인사적 기록을 하나 더하면, 윤이상 선생(1917. 9.17-1995. 11.3)이 저 세상으로 돌아간 지 10년째 되는 해이다. 그는 토마스 울프(Thomas Wolf)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 하리 You Can’t Go Home Again』(1940)처럼, 1967년 소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국제 음악계와 독일정부의 노력으로 독일로 돌아간 후 다시는 고향 통영에 가지 못하였다.
그는 고향과 조국을 잃은 설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한 후에도 ‘서양현대음악 기법으로 한국적 이미지를 표현한다거나 한국음악의 연주기법에 서양악기를 결합시켜 불멸의 윤이상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인 《심청》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19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1981),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19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우리 음악교육사에서 잊혀진 기록 가운데에는 윤이상과 관련된 사실을 반드시 짚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전쟁기, 전화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로하고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의 교육현장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전시작곡가협회>의 회원들과 함께 윤이상이 초등학교용 학년별 6권의 음악교과서와 노래책 『소년 기마대』를 제작한 사실이다. 그 책들에는 총 105곡의 동요가 실려 있고 그 가운데 최소한 55곡이 윤이상의 작품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곡들로는 《꼬마 위문대》, 《아가 병정》, 《날아라 소년 항공기》, 《꼬마 병정 나가신다》, 《반디야 반디야》, 《말조심》 등이 있지만, 2003년 현재 초등학교에서 쓰이는 음악 교재 어디에도 윤이상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조국은 철저하게 윤이상을 부정했으나, 윤이상은 생전에 베를린 자택 앞마당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고 일본을 방문할 때는 멀리서나마 고향 앞바다를 보기 위해 남해안 근처까지 가는 등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94년부터 1995년초까지 일본에 머물면서도 늘 가고 싶어 한 곳은 고향. 그는 먼 발치 현해탄에서 통영을 바라다보고 독일로 돌아간 직후 세상을 떴다.
그러나 윤이상 선생과 관련하여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바로 그의 불멸의 연인 이수자 여사의 귀국 문제이다. 그에게 있어서 윤이상은 사랑하는 지아비이자, 자신의 긍지이며 자부심이다. 그 절절한 사랑을 『내 남편 윤이상 상,하』(창작과비평사, 1998)에 쏟아내었다.
부부를 잘 아는 지인들은 얘기한다. 윤이상의 고향 방문의 희망을 좌절(?)시킨 사람이 바로 이수자 여사라고. 이 여사는 “남편의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갈 수 없다”며 1967년 동백림 사건 이후 한 번도 고국을 찾은 적이 없다. 우리는 윤이상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실에만 주목할 뿐, 사실 이수자 여사도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윤이상 선생과의 사별 후 그는 아들, 딸이 독일에서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 안타까워 독일을 나가 자유롭게 살도록 하였다. 자신은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북녘을 방문하곤 한다. 이미 김일성 고 주석은 생전에 윤이상 선생에게 평양근교 아담한 산장-소위 ‘철봉산장’-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이제 독신이 된 이 여사는 고향이 그립고 고향사람이 그리울 때면 그곳을 찾아간다. 또한 북녘 곳곳을 누비며 북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며 또 다른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발자취에는 윤이상 선생의 흔적이 깃들여 있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 녹아있다. 오늘도 그는 윤이상과의 대화를 계속한다. 그 기록이 바로 『나의 독백: 윤이상 부인 이수자의 북한 이야기』(한겨레신문사, 2001)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난민 아닌 난민의 심정으로 분단 없는 조국을 꿈꾸며 조국의 사람들과 산천을 접하며 느낀 심정을 진솔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이수자 여사를 발견한다. 그에게서 북녘을 애써 꾸미려 하는 기색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1990년 초 베를린, 윤이상 선생에게 북녘과의 경협사업의 길을 터달라며 한국의 유명 기업인이 찾아 왔을 때의 대화이다.
옆에 앉아 듣고 있던 나(이수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러한 길(남북경협)을 통해서 가난하게 사는 북의 인민들에게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했다.
나의 말이 떨어지자 그분(남측 기업가)은 이렇게 말했다.
“가난이란 말은 정신의 태도, 생활의 태도를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정의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치스럽게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먹고 산다고 해서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가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 잘 아는 진리의 말에 나는 얼굴이 뜨거워짐을 감출 수 없었고, 나는 그 기업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말을 단순하고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재생하는 나의 멍청한 사고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북녘 평양 철봉산장에는 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족들이 있다. 보디 가드이자 접대원인 영식이, 딸 노릇을 하는 옥이, 세퍼트견 순남이 등이 그의 가족이다. 하루는 옥이 텔레비전을 보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텔레비전) 화면이 바뀌며 도로 공사장, 수리 공사장, 토지 정리장 등의 소식이 보도된다. 밤낮 보는 보도는 내 눈에나 귀에는 늘 똑같아 보인다.
“어이구, 어째 밤낮 똑같은 보도만 하니. 어제도 그제도 본 것 아니니?”
나는 따분하다. 옆에 앉아 같이 보고 있던 옥이가 설명하듯 한마디 한다.
“어머니, 어데 같은 것입니까. 어제는 자강도이고 오늘은 남포도로공사인데……”
나에게는 다 똑같아 보이는 공사현장이다.
“이거 너무하지 않니?”
그러나 옥이의 눈은 분명히 장소가 다르고, 공사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내 눈과 옥이 눈이 같겠는가.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취미와 옥이의 취미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이런 처지를 이해하기에 남과 북이 어떤 자세로 만나야 할 지를 알고 있다.
“반세기라는 세월은 한 세대가 지나가는 시간이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보고 듣고 살아왔다. 나도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이해하는 정신과 생활태도를 가져보자고 생각했다.”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평화교육의 출발점인 차이의 이해와 다양성의 공존의 가능성을 이수자 여사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초기에는 윤이상 선생과 함께, 또 하나의 조국을 찾아갔지만, 10년이 넘는 동안 북녘 사람들과 만나고 살면서 개인적 삶을 넘어서, 사회주의적 생활양식과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간의 공존 가능성을 확인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모습에서 역시 이념은 인간을 넘어설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기록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1990년대 중후반 북녘 경제난에 대한 체험을 3자적 관점과 역지사지하려는 태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1999년) 8월 2일은 비가 내렸다. (양강도, 과거의 함경남도)대홍단을 둘러보았다. 이곳도 항일전적지이며 북의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곳이다.
(……) 어디로 가나 산이 첩첩 이어져 있는 북의 경치로는 드물게 이곳 대홍단은 마치 눈에 익은 유럽의 풍경이다. 해방 1,000미터 높이에 자리잡은 이곳은 넓은 대평야이다. 추운 곳이라 농작물이 잘 되지 않아 경작지 적은 북의 실정에 이 넓은 고원지대를 그냥 버려두기 안타까워 지난 몇 년간 수해 피해로 식량난을 겪은 북이 정책을 바꾸었다. 북은 쌀밥을 최고로 치는 우리 백성들의 식생활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고심하고 있다. (……)
인구가 적은 이 북방 양강도에 농사짓는 이주민을 모집한 결과, 제대군인 1,000명이 희망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도시처녀 1,000명이 지원했다. 그들이 평양을 떠날 때 도로 주변에서 꽃다발을 던지며 크게 환송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봤다.
문화제국주의적 관점이 아닌, ‘눈높이’식 이해의 관점에서 소위 북녘의 ‘감자농사혁명’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조국의 명승고적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는 남녘에서 잃어버린 ‘금수강산’을 북녘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의 악몽으로 인해 조국을 잊어버리려 했지만, 1979년 처음 방문한 북녘, “조국의 푸르고 높은 하늘, 찬란한 햇빛, 솔솔 불어오는 맑고도 깨끗한 훈풍, 논에 나부끼는 황금 나락, 점점이 서 있는 낮은 산들……”을 바라보며 잊었던 금수강산에 한정 없는 눈물을 흘렸다. 방북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겪어본 체험이 아닐까 싶다. 5년 전 처음 북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1시간 이상을 계속 울었던 내 모습은 이수자 여사의 25년전 모습과 다름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아름다운 산하가 왜 60년이 다되도록 갈려져 있는가? 누구의 잘못인가?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 선생이 음악으로밖에는 고국에 올 수 없던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80을 바라보는 노인 이수자 선생이 왜 아직도 고향을 자유롭게 찾고 가족을 편안하게 만날 수 없는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 잘못을 이제는 그만두자. 이 지긋지긋한 분단의 악몽에서 깨어날 때가 이미 지났는데도 우리는 너무 늦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이수자, 『나의 독백: 윤이상 부인 이수자의 북한 이야기』 목차 책을 내면서 |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