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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선인출판사) 글/ 사진 : 민족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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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자체 월간지인 <민족21>에 연재한 내용을 뼈대로 이 책을 엮어낸 [민족21]은 "북녘 사회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나보십시오."로 시작하는 책의 머리말에서 북녘의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고 권한다. 가장 완벽한 ‘북녘 인민 생활사’는 직접 만나 눈으로, 가슴으로 느끼는 것 아닐까. 그 날을 기대하며 기획 연재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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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북녘 사람들의 생활을 태어나면서부터 유치원 생활,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생활, 직장과 군대, 농촌 생활, 연애와 결혼, 여가와 명절을 즐기는 모습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노후와 장례`를 알아보자.
사진 ▶ 대동강에서 열린 낚시대회에 참가한 북녘의 할아버지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조금 빠르고 늦은 차이만 있을 뿐.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죽음을 준비하게 된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직장에서, 군대에서 물러난 북녘 노인들의 삶의 모습과 가는 길을 들여다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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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나면 모두 자기 일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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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맞아 성묘하고 있는 북 주민들 | 몇 년 전 평양 남산병원 부원장 류식 박사는 《100년 장수에로의 길》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장수와 노화`, `장수와 물`, `장수와 운동`, `장수와 담배`, `술` `장수와 질병` 등 8개 항목으로 장수 비결을 일러주고 있어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저러한 운동이며 요법을 하면 오래 산다는 장수 비법들은 남에서건 북에서건 혹은 세계 어느 곳에서건 솔깃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백년 만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누구나 언젠가는 태어난 품으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가고 나면 그 뒷자리는 남은 사람의 몫. 북에서는 동네에 초상이 나면 인민반원들이나 자식을 비롯한 직계가족의 직장 동료들이 초상집을 찾아가 함께 장례를 치러준다. 특히 집단주의 생활에 익숙한 북녘 사람들은 마을에 초상이 나면 하나같이 자기 일처럼 정성껏 일을 거들어 주고 슬픔을 함께 나눈다. 또 자식이 없이 년로보장금으로 혼자 노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노인의 경우 동사무소에서 받은 년로보장금 1개월 분으로 도시경영사무소에서 관을 구입해서 인민반원들이 장례를 치러준다고 한다. 병원 또는 해당 진료소에서 사망진단서를 발급 받아 동사무소에 제시하면 소정의 장례비와 함께 쌀 한 말, 술 배정표(3홉들이 소주 5병)가 지급된다. 최근에는 농민시장이나 시장에서 직접 장례물자를 구입하기도 한다. 장례는 보통 3일장으로 치르며 직계존속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직장에서 3~5일의 휴가를 준다. 장례시에는 상복은 따로 입지 않고 양초나 향, 종교의식은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남자는 상장과 검은 천을 팔에 두르고 여자는 머리에 흰 리본을 단다고 한다. 염습, 입관, 운구, 매장 등은 녹화사업소나 편의협동조합에서 맡아 해준다. 매장은 각 도, 시, 군별로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공동묘지가 조성돼 있어 공동묘지에 모신다. 그런데 좁은 땅덩어리에 묘지난이 심각하기는 북도 마찬가지. 그래서 1970년대 중반부터 화장을 공식적으로 권장하고 있으며 평양을 비롯해 각도 단위별로 화장터 건설을 확대 추진해왔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매장을 선호하는 풍조가 남아있어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은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녹화사업소나 편의협동조합원들과 함께 봉분 성토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상주는 바로 동사무소에 나가 사망신고를 해야 한다. 사망진단서를 가지고 동사무소에 나가 공민등록대장에서 사망자 이름을 삭제한 후 진단서에 도장을 받아 거주지 분주소로 가서 사망신고를 한다. 거주지 분주소 지도원은 사망신고가 들어오면 사망자의 이름을 공민등록대장에서 삭제하고 가족으로부터 공민증을 받으면 사망신고가 끝나게 된다. 또 사망자가 당원인 경우는 공민증 반납 후 조선로동당 당원증도 해당 기업소 초급 당비서 또는 지역 당비서에게 반납해야 한다. 이밖에 삼우제와 같은 제사는 가까운 일가 친척이 모여 밤에 지내고 대개 1년 만에 탈상을 하는데 탈상 때는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이 찾아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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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지내는 장례, 국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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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4일 치뤄진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장례식.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연합뉴스 | 한편 국가적으로 지위가 높은 인물이 사망했을 때에는 `국장`과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조선말대사전>에 따르면 `국장`은 "(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국가적으로 지내는 장례"이며 `사회장`은 "사회적으로 지내는 장례"라고 설명되어 있다. `국장`의 대표적인 사례가 1994년 7월 8일 세상을 떠난 김일성 주석이다. 이때 7월 8~17일간을 `애도기간`으로 정한 후 영결식을 이틀간 연기한 끝에 7월 19일 국장으로 거행됐다. 1990년대 이후 국장으로 치른 주요 인물을 보면 전 국가 부주석인 리종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1999.9)을 비롯해 김병식 전 국가 부주석(1999.7), 전문섭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1998.12), 최광 전 인민무력부장(1997.2), 김광진 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1997.2), 리승기 전 과학원 함흥분원장(1996.2),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1995.2), 강희원 전 부총리(1994.7), 서철 전 조선로동당 정치국원(1992.9), 홍기문 전 사회과학원 부원장(1992.7) 등이다. 국장은 보통 3~5일장으로 치러진다. `사회장`으로 치른 인물은 지난 2001년 11월 사망한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를 비롯해 1995년 7월 사망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여성동맹 중앙상임위 박정현 고문, 1998년 8월 사망한 총련 금강산가극단 엄국지 부단장 등이 있으며 남측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역임한 후 6·25때 월북한 송호성 씨와 해방 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 등을 지냈던 조완구 선생 등의 영결식도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최근 세상을 떠난 김용순 조선로동당 비서의 경우는 현재까지 `국장`으로 치렀는지 `사회장`으로 치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북의 고위 간부들이 사망하면 시신을 평양시 보통강구역의 고위간부 주택단지 안에 있는 서장구락부에 안치해 장례식을 치른다. 리종옥 전 부총리, 비전향장기수 리종환 선생(2001년 11월), 신인영 선생(2002년 1월), 항일빨치산 출신 조명선 강건종합군관학교장(1994년 7월) 등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노후에서 장의까지, 북의 생활사는 남쪽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차이도 느껴진다. 북에서는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남에 살건 북에 살건 누구나 때가 되면 황혼을 맞게 되고 이승을 떠나야 한다. 세상을 떠나며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과 애착도 있을 것이다. 많은 북녘의 동포들도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통일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애통함을 안고 가지 않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