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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선인출판사) 글/ 사진 : 민족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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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자체 월간지인 <민족21>에 연재한 내용을 뼈대로 이 책을 엮어낸 [민족21]은 "북녘 사회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나보십시오."로 시작하는 책의 머리말에서 북녘의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고 권한다. 가장 완벽한 ‘북녘 인민 생활사’는 직접 만나 눈으로, 가슴으로 느끼는 것 아닐까. 그 날을 기대하며 기획 연재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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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북녘 사람들의 생활을 태어나면서부터 유치원 생활,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생활, 직장과 군대, 농촌 생활, 연애와 결혼, 여가와 명절을 즐기는 모습까지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노후와 장례`를 알아보자.
사진 ▶ 대동강에서 열린 낚시대회에 참가한 북녘의 할아버지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조금 빠르고 늦은 차이만 있을 뿐.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죽음을 준비하게 된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직장에서, 군대에서 물러난 북녘 노인들의 삶의 모습과 가는 길을 들여다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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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릉 - 북의 국립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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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주민들이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 "떠나간 나이와 고장은 저마다 달랐어도 돌아 와 안긴 품은 하나인 대성산 혁명렬사릉, 항일전에서 쓰러진 렬사들 여기 고이 잠들고 있나니 사람들이여 삼가 옷깃을 여미라···"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 주작봉 마루의 혁명열사릉 입구에 서 있는 헌시비에 새겨져 있는 비문의 한 대목이다. 이곳 혁명열사릉은 애국열사릉과 함께 남쪽의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이북의 `국립묘지`이다. 남쪽의 현충원(전체면적이 143㎡)이 국가원수 묘역, 애국지사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군인·군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일반 묘역, 외국인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과 달리 혁명열사릉(전체 면적 35만㎡)에는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유격대 활동에 참여했던 `항일혁명가` 130여명만이 안장돼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이북 정권의 뿌리를 형성한 `혁명1세대`의 핵심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는 셈이다. 북은 혁명열사릉이 "항일혁명선렬들을 영생의 모습으로 내세우며 혁명전통을 대를 이어 계승 발전시켜 나가려는 로동당과 인민의 확고한 의지를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묘역은 노동당 창건 30돌을 맞는 1975년 10월 문을 열었으며 1985년 10월 확장 공사를 마쳤다. 묘역의 정면과 좌우측면에는 항일혁명투쟁과 지하혁명투쟁을 상징하는 부각상이 각각 세워져 있다. 또 그와 잇닿은 양옆에는 종합비문이 있으며 그 위로는 항일혁명투사들의 반신상과 분묘, 비석이 각 개인 앞에 하나씩 놓여있다. 이들 반신상과 비석에는 묻힌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 및 약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쪽과 아래쪽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깃발과 화환증정대가 각각 설치돼 있다. 남쪽의 묘역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은 묘비 외에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반신상은 모두 동으로 생동감 있게 형상돼 있으며 생전 모습 그대로 서서 수도 평양시의 중심부를 바라보고 있다. 반신상 구역에서 제일 높은 단의 중앙에 김일성 주석의 부인인 김정숙의 반신상이 자리잡고 있고 그 왼쪽으로 김책, 안길, 류경수, 김경석, 최용건, 최현, 림춘추가, 오른쪽으로 강건, 최춘국, 오중흡, 최희숙, 김일, 오백룡, 오진우 등 노동당과 내각, 인민군의 최고지위에 올랐던 인물들이 배치돼 있다. 반신상은 맨 아래단에서부터 윗단으로 올라가면서 기본적으로 희생된 연대순위에 따라 배열돼 있다. 최근에는 1994년 사망한 조명선 강건군관학교장, 주도일 대장, 1995년 사망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겸 군총정치국장, 1997년 사망한 태병렬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장과 최광 인민무력부장, 1998년 사망한 전문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 등이 이곳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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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열사릉 전경(위)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묘 ⓒ연합뉴스(아래) | 한편 규모나 권위면에서 혁명열사릉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지만 사망한 고위인물들이 주로 안치되는 곳으로 애국열사릉이 있다. 애국열사릉은 평양 교외 형제산구역 신미리에 있는데 혁명열사릉에 안치되는 인물보다 정치적 비중이 한 등급 정도 낮은 간부들이 이곳에 묻힌다. 지병학, 임춘추, 전문섭처럼 처음에는 이곳에 안치됐다가 혁명열사릉으로 이장되는 경우도 있다. 애국열사릉에는 월북인사 중 이북 정권에 참여했거나 사회주의건설에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 고위간부, 일부 민족주의인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묻혀 있다. 애국열사릉은 반신상이 세워져 있는 혁명열사릉과 달리 묘비가 화강암 기단 위에 150㎝ 정도 높이의 흰 대리석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다. 애국열사릉은 1986년 9월 17일 완공되었다. 당시까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애국렬사`들을 한데 모아 처음에는 190위가 모여졌다. 5년 후 40여 명이 늘었고 현재 약 350위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의 열사선정 기준은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이다. 애국열사릉 초입에 있는 대형동판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다. 애국열사릉에 묻힌 사람들을 유형별로 묶어 살펴보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들이 발견된다. 첫째, 예상외로 비사회주의 계열의 민족주의 인사들이 상당수 묻혀있다는 사실이다. 애국열사릉에 들어서면 두 번째 줄에서 임시정부의 부주석과 해방 후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규식의 묘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주변에 조소앙, 최동오, 조완구, 윤기섭, 엄항섭, 유동열 등의 임정요인들이 묻혀 있다. 이들은 대부분 6·25전쟁 때 북으로 간 인사들로 `애국지사`라는 호칭이 붙어있다. 둘째, 일부 국내파 공산주의자와 남조선노동당 계열 출신인사들이 선별적으로 묻혀 있다는 점이다. 일제시기와 해방 직후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현준혁, 김삼룡, 이현상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남로당은 아니었지만 해방 직후에 다양한 정당에서 활동하다가 월북 후 북에서 고위관리로 활동한 인물도 있다. 저명한 고대사연구가이자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지낸 백남운(해방 직후 남조선신민당 위원장),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유명한 이준 열사의 아들로 도시경영상을 역임한 이용(해방 직후 신진당 위원장), 해방 후 통일민주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월북 후 내각 부수상까지 지낸 홍명희,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을 역임하다 월북 후 조국통일사 사장을 지낸 이만규 등의 묘가 이곳에 있다. 셋째, 애국열사릉에는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가묘형태로 묘비만 세워져 있는 인물이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6?25전쟁 전후 지리산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로 소문이 났던 이현상, 1958년 `진보당사건`으로 체포돼 다음해 사형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회당 서울시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 5·16군사쿠데타 직후 사형당한 최백근, 1968년 8월 남쪽을 떠들썩하게 했던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체포돼 사형당한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김종태, 전라남도위원회 위원장 최영도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애국열사릉에는 이밖에도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서 개회사를 한 1877년생의 최고령자인 김월송, 이름난 작곡가인 이면상, 연극배우 황철, 소설 <두만강>으로 유명한 이기영, 월북과학자인 도상록, 세계여자탁구대회에서 두 번 우승해 체육영웅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박영순 등 각계의 인사들이 안치돼 있어 애국열사의 범주가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의 주요 국가기념일에는 당·정·군의 고위간부들과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을 찾아 참배한다. 그만큼 이곳은 북의 `혁명전통`을 상징하는 성지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교양하는 교육장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