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새』
: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 지은이 : 류춘도
■ 당대(2005년 9월)
화마에 할퀸 한반도
눌러도 눌러도 흘러나오는 소리 없는 통곡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식지 않는 핏물
60년, 잊힐 만도 한데
벙어리새는 찢기고 상처난 날개를 퍼덕이며
벙어리새 가슴속 기억들을 노래한다.
(“벙어리새의 노래”, 김귀옥, 2005. 12. 5)
그런데 이미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자신이 할 일을 자각하고 있는 듯하였다. 몇 년간 그녀는 자신이 1950년 7월 중순부터 9월 하순까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50여 년 전 어슴프레한 조각난 기억들을 꿰맞추어 그때 만났던 사람과 마을을 쫓아다녔다.
수십년간 잊고 살았던 서울여자의과대학(현재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동창들이나 친구들과도 다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전날 열혈 사회주의 청년들이자 애국심으로 충천했던 여자친구들은 그녀를 향해 ‘니, 빨갱이 아이가?’ 라고 말하며 말문을 막았다. 그녀의 시에서 꽁꽁 감춰둔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한국과 일본의 여러 지인들이 건네주는 소중한 정보나 자료들을 당시 상황과 대조하여 당대를 재구성하였다. 자신이 수도극장에서 봤던 영화 제목을 찾고, 하숙집 주인의 실체를 조사해 나갔다. 자신이 따라갔던 부대들이나 얼핏 만난 빗자루부대의 실체를 확인해나갔다. 그녀는 한 번 찾은 곳에서 다음 찾을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정보를 눈덩이 굴리듯 찾아나갔다. 일단 그녀를 한번 만났던 사람들은 그녀를 잊지 않고 정보가 생기면 반드시 연락을 주었다. 그들은 그녀의 친절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잊지 않고 기록하겠다는 절실한 심정에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자이크 꿰맞추듯 진행된 재구성 작업과 지인들과의 토론, 거듭되는 글쓰기로 초고를 일단락 지었던 것은 2004년 7월. 그 무렵 그녀에게 새로운 시련이 찾아들었다. 갑작스런 연행과 행방불명. 그 후 육 개월 이상을 그녀는 다시 불행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그녀는 분단된 산하에서는 영혼조차 자유로울 수 없음을 절감했다. 1년 여의 시간을 허비하고야 분단과 전쟁 8년의 기록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벙어리새』(당대, 2005)이다.
두 권은 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성혜랑은 이한영의 어머니로 알려진 여성으로 일제시대 기자 김원주의 딸이라고 한다. 성혜랑은 어머니의 일대기와 자신의 일대기를 그려나갔고, 남북의 현대사를 모두 만날 수 있다. 교수 조은의 책은 분단과 전쟁이 개인가족사에 영향을 미친 모습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으나, 자신의 가계사에 관한 충실한 재현물이라는 점에서 회고록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음으로 류춘도의 책은 이미지 지향적이다. 마치나 그림을 그리듯 글이 씌어졌다. 아마도 그런 그녀의 글 맛이 많은 시를 쓰게 했나 보다. 조은의 글이 연상법과 문어적 글쓰기에 충실하여 작가의 자의식이 빛나고 있다면, 류춘도의 글은 그만큼 세련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머리로 읽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면서 읽게 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세상을 드러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원인이 되어준 사실에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문턱에 걸려 넘어진 아이가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은 문턱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인생의 문턱을 분노하기 보다는 무엇이 문턱을 만들었는가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문턱 또한 자신의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며 사랑하고 만다.
그가 첫 시집으로 세상에 말걸기를 시작하기까지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는 투쟁을 하였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살아온 40여 년, 그는 의사라는 안온한 직업에 젖어들기보다는 한국전쟁 당시 한 명의 생명이라도 살려내야 한다는 심정으로 새 생명을 받아내었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과 의사로서는 보기 드문 겸손한 태도는 자신의 병원 간호사들을 감동시켜 왔다. 그런 가슴 속에는 이땅의 피흘리는 민중,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하는 벙어리새가 살고 있었다.
이제 다른 각도에서 그의 책을 볼 수 없을까?
우선 그의 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을 보자. 그녀는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민중을 연민할 줄 알고,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철저한 인간주의자이다. 1950년 예비의사 앞에 생명에는 좌우가 없었다. 그녀에게 찾아오는 국군도 인민군도 그저 부상병일 뿐이었다. 그런 정신이 국경 없는 의사(?)를 만든다. 그건 그녀나 민중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전공의)의 지시가 지친 의료진에게 그나마 용기를 주었다. 나는 부상병의 응급치료와 기록을 시작했다. 부상병들은 대부분 팔과 다리에 골절상과 타박상, 그리고 무엇엔가 찍힌 듯한 상처를 입었다. 총상이나 파편으로 인해 수술을 하는 환자는 드물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26일 오전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개중에 전날 당직을 선데다 연이어 들어오는 부상병들에게까지 시달린 의료진들은 얼굴에 피로가 겹겹이 쌓였지만 교대할 시간도 사람도 없었다. 오후에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해가 머리 위를 지나 서쪽 하늘에 걸릴 때까지도 부상병을 실어오는 차량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72쪽)
야전병원에는 하루가 다르게 많은 부상자가 몰려들었다. 부상의 양상도 말할 수 없이 참혹해져 갔다. 미군기가 퍼부은 네이팜탄으로 인해 인민군 부상병들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공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부어서 튀어나온 입, 코, 눈, 그리고 살갗이 벌겨진 곳에서 붉은 체액이 흘러내리는 그들의 몰골은 너무도 참혹했다.(…) 온 마을이 병원이었지만 더 이상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약품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마을사람들의 따뜻한 협조였다. 마을 사람들은 보다 못해 자신들이 자는 방까지 비워주고 산으로 올라가 자기도 했다.(158쪽)
어떤 부상병에게 더라고 할 수 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였다. 차라리 공정하게 서술함으로써 ‘편향’이 되는 기록이라고 할까?
다만 그가 왜 이승만정부나 우익세력들에 분노했는지, 그건 일반 대중들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또한 서울 시민이 왜 인민군을 환영하고 의용군으로 참전했는지를 다음을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럴 수가! 1천여 명의 인명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한강 인도교의 처참한 모습 앞에서 우리 모두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엿가락처럼 흉측하게 휘어지고 두 동강이가 나서 각각 머리를 물속에 처박은 인도교에는 아직도 검붉은 핏자국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 어젯밤 기숙사에서 마지막 밤을 지낼 때도, 의용군에 지원서를 낼 때도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전쟁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오면서 반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온몸을 치떨었다. 내가 이 전쟁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125~126쪽)
민족을 버리는 정권에 대한 분노감은 서울이 유엔군에 수복된 후 서울에 체류했던 모든 시민들이 ‘부역반도’로 찍혔을때 하늘을 치솟았을 것이지만, 류춘도의 경험을 뛰어넘는 얘기이다.
한편 나는 이전에 류춘도 선생과 같은 의과대학 여학생으로, 인민군 군의관으로 잠시 일했던 여성의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반공으로 얼룩진 기억에서는 당시의 처참한 현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그녀의 기억에는 반공에 중독되지 않은 기억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반공에 중독되지 않은 기억을 좌편향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또한 불온한 기억일까?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심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좋소, 그러나 동무! 이 여성동무는 후방으로 돌려보내시오!”
“예?”
군관이 놀라 움찔했다.
“동무는 알지 않소!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이젠 치료할 부상병도 없을 거요.”
이렇게 말을 끊은 젊은 지휘관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동무, 잘 가시오. 목숨은 귀중한 것이오.”(169쪽)
인민군과 생명의 소중함. 반공에 중독된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어 류춘도 선생이 꿈꾸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그에게는 너무도 생생한 기억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영웅시 하고 싶지 않다. 말 못한 채 죽어갔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 땅의 수많은 벙어리새들을 알기 때문이다. 2005년 12월 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불완전한대로 출범하였다. 위원회 작업을 통해 냉전의 시대가 만든 벙어리새들이 해방되기를 바라며, 류춘도의 책이 벙어리새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를 희망해본다.
『벙어리새』 :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 |
프롤로그: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픔 1. 2. |
3. 4. 에필로그: 당신이 나입니다 |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
『벙어리새』
: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 지은이 : 류춘도
■ 당대(2005년 9월)
화마에 할퀸 한반도
눌러도 눌러도 흘러나오는 소리 없는 통곡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식지 않는 핏물
60년, 잊힐 만도 한데
벙어리새는 찢기고 상처난 날개를 퍼덕이며
벙어리새 가슴속 기억들을 노래한다.
(“벙어리새의 노래”, 김귀옥, 2005. 12. 5)
그런데 이미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자신이 할 일을 자각하고 있는 듯하였다. 몇 년간 그녀는 자신이 1950년 7월 중순부터 9월 하순까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50여 년 전 어슴프레한 조각난 기억들을 꿰맞추어 그때 만났던 사람과 마을을 쫓아다녔다.
수십년간 잊고 살았던 서울여자의과대학(현재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동창들이나 친구들과도 다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전날 열혈 사회주의 청년들이자 애국심으로 충천했던 여자친구들은 그녀를 향해 ‘니, 빨갱이 아이가?’ 라고 말하며 말문을 막았다. 그녀의 시에서 꽁꽁 감춰둔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한국과 일본의 여러 지인들이 건네주는 소중한 정보나 자료들을 당시 상황과 대조하여 당대를 재구성하였다. 자신이 수도극장에서 봤던 영화 제목을 찾고, 하숙집 주인의 실체를 조사해 나갔다. 자신이 따라갔던 부대들이나 얼핏 만난 빗자루부대의 실체를 확인해나갔다. 그녀는 한 번 찾은 곳에서 다음 찾을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정보를 눈덩이 굴리듯 찾아나갔다. 일단 그녀를 한번 만났던 사람들은 그녀를 잊지 않고 정보가 생기면 반드시 연락을 주었다. 그들은 그녀의 친절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잊지 않고 기록하겠다는 절실한 심정에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자이크 꿰맞추듯 진행된 재구성 작업과 지인들과의 토론, 거듭되는 글쓰기로 초고를 일단락 지었던 것은 2004년 7월. 그 무렵 그녀에게 새로운 시련이 찾아들었다. 갑작스런 연행과 행방불명. 그 후 육 개월 이상을 그녀는 다시 불행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그녀는 분단된 산하에서는 영혼조차 자유로울 수 없음을 절감했다. 1년 여의 시간을 허비하고야 분단과 전쟁 8년의 기록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벙어리새』(당대, 2005)이다.
두 권은 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성혜랑은 이한영의 어머니로 알려진 여성으로 일제시대 기자 김원주의 딸이라고 한다. 성혜랑은 어머니의 일대기와 자신의 일대기를 그려나갔고, 남북의 현대사를 모두 만날 수 있다. 교수 조은의 책은 분단과 전쟁이 개인가족사에 영향을 미친 모습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으나, 자신의 가계사에 관한 충실한 재현물이라는 점에서 회고록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음으로 류춘도의 책은 이미지 지향적이다. 마치나 그림을 그리듯 글이 씌어졌다. 아마도 그런 그녀의 글 맛이 많은 시를 쓰게 했나 보다. 조은의 글이 연상법과 문어적 글쓰기에 충실하여 작가의 자의식이 빛나고 있다면, 류춘도의 글은 그만큼 세련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머리로 읽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면서 읽게 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세상을 드러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원인이 되어준 사실에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문턱에 걸려 넘어진 아이가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은 문턱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인생의 문턱을 분노하기 보다는 무엇이 문턱을 만들었는가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문턱 또한 자신의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며 사랑하고 만다.
그가 첫 시집으로 세상에 말걸기를 시작하기까지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는 투쟁을 하였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살아온 40여 년, 그는 의사라는 안온한 직업에 젖어들기보다는 한국전쟁 당시 한 명의 생명이라도 살려내야 한다는 심정으로 새 생명을 받아내었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과 의사로서는 보기 드문 겸손한 태도는 자신의 병원 간호사들을 감동시켜 왔다. 그런 가슴 속에는 이땅의 피흘리는 민중,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하는 벙어리새가 살고 있었다.
이제 다른 각도에서 그의 책을 볼 수 없을까?
우선 그의 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을 보자. 그녀는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민중을 연민할 줄 알고,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철저한 인간주의자이다. 1950년 예비의사 앞에 생명에는 좌우가 없었다. 그녀에게 찾아오는 국군도 인민군도 그저 부상병일 뿐이었다. 그런 정신이 국경 없는 의사(?)를 만든다. 그건 그녀나 민중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전공의)의 지시가 지친 의료진에게 그나마 용기를 주었다. 나는 부상병의 응급치료와 기록을 시작했다. 부상병들은 대부분 팔과 다리에 골절상과 타박상, 그리고 무엇엔가 찍힌 듯한 상처를 입었다. 총상이나 파편으로 인해 수술을 하는 환자는 드물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26일 오전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개중에 전날 당직을 선데다 연이어 들어오는 부상병들에게까지 시달린 의료진들은 얼굴에 피로가 겹겹이 쌓였지만 교대할 시간도 사람도 없었다. 오후에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해가 머리 위를 지나 서쪽 하늘에 걸릴 때까지도 부상병을 실어오는 차량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72쪽)
야전병원에는 하루가 다르게 많은 부상자가 몰려들었다. 부상의 양상도 말할 수 없이 참혹해져 갔다. 미군기가 퍼부은 네이팜탄으로 인해 인민군 부상병들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공처럼 부어올라 있었다. 부어서 튀어나온 입, 코, 눈, 그리고 살갗이 벌겨진 곳에서 붉은 체액이 흘러내리는 그들의 몰골은 너무도 참혹했다.(…) 온 마을이 병원이었지만 더 이상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약품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마을사람들의 따뜻한 협조였다. 마을 사람들은 보다 못해 자신들이 자는 방까지 비워주고 산으로 올라가 자기도 했다.(158쪽)
어떤 부상병에게 더라고 할 수 없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였다. 차라리 공정하게 서술함으로써 ‘편향’이 되는 기록이라고 할까?
다만 그가 왜 이승만정부나 우익세력들에 분노했는지, 그건 일반 대중들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또한 서울 시민이 왜 인민군을 환영하고 의용군으로 참전했는지를 다음을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럴 수가! 1천여 명의 인명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한강 인도교의 처참한 모습 앞에서 우리 모두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엿가락처럼 흉측하게 휘어지고 두 동강이가 나서 각각 머리를 물속에 처박은 인도교에는 아직도 검붉은 핏자국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 어젯밤 기숙사에서 마지막 밤을 지낼 때도, 의용군에 지원서를 낼 때도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전쟁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오면서 반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온몸을 치떨었다. 내가 이 전쟁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125~126쪽)
민족을 버리는 정권에 대한 분노감은 서울이 유엔군에 수복된 후 서울에 체류했던 모든 시민들이 ‘부역반도’로 찍혔을때 하늘을 치솟았을 것이지만, 류춘도의 경험을 뛰어넘는 얘기이다.
한편 나는 이전에 류춘도 선생과 같은 의과대학 여학생으로, 인민군 군의관으로 잠시 일했던 여성의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반공으로 얼룩진 기억에서는 당시의 처참한 현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그녀의 기억에는 반공에 중독되지 않은 기억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반공에 중독되지 않은 기억을 좌편향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또한 불온한 기억일까?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심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좋소, 그러나 동무! 이 여성동무는 후방으로 돌려보내시오!”
“예?”
군관이 놀라 움찔했다.
“동무는 알지 않소!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이젠 치료할 부상병도 없을 거요.”
이렇게 말을 끊은 젊은 지휘관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동무, 잘 가시오. 목숨은 귀중한 것이오.”(169쪽)
인민군과 생명의 소중함. 반공에 중독된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어 류춘도 선생이 꿈꾸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그에게는 너무도 생생한 기억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영웅시 하고 싶지 않다. 말 못한 채 죽어갔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 땅의 수많은 벙어리새들을 알기 때문이다. 2005년 12월 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불완전한대로 출범하였다. 위원회 작업을 통해 냉전의 시대가 만든 벙어리새들이 해방되기를 바라며, 류춘도의 책이 벙어리새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를 희망해본다.
『벙어리새』 :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 |
프롤로그: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픔 1. 2. |
3. 4. 에필로그: 당신이 나입니다 |
김귀옥 교수 소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1987), 동대학 대학원 석,박사(1991, 1999).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여성연구소의 전임연구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빙연구원 등을 거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객원교수,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성대학교 교양과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다이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에 걸쳐있으며, 관련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fieldwork research)와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기억 속에 묻혀있는 자료를 발굴, 정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 『이산가족,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닌...: 이산가족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각』(역사비평사, 2004),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밑으로부터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2002),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당대, 2000), 『남북한의 실질적 통합을 위한 여성정책 강화방안』(공저, 통일연구원, 2002), 『한국사회사 연구』(공저, 나남, 2003) 등이 있다.